스카치위스키의 역사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의 발상지 중동지역은 여러 가지 술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포도주 양조 방법을 그리스 로마에 전파하였으며 맥주 양조 방법을 유럽 각국에 보급하였다.

증류주전파경로

 

전 세계의 증류주도 따지고 보면 중동에서 퍼져 나갔다 할 수 있다.

10세기경 중동지역의 연금술사들은 보통 금속으로 금을 만들려고 온갖 실험을 다 하였다.

그 중 하나가 증류 방법이었다. 예루살렘이 회교도들에게 점령된 이래 가톨릭을 국교로 믿는 유럽의 제국들은 성지 탈환을 꿈꾸어 왔다.

 

 

십자군전쟁

100여 년간 10여 차례에 걸쳐 유럽의 다국적군들이 십자군 운동을 벌일 때 북국의 오지 스코틀랜드의 수도사들도 군종으로 참가하였다.

그들은 연금술사들에게 증류기술을 배웠으며, 전쟁에서 돌아온 수도사들은 스코틀랜드의 토속 에일 맥주를 증류하여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을 만들었다.

 

이것이 스카치위스키의 효시가 되었다.

위스키란 말의 어원은 스코틀랜드 고어인 겔릭어로 ‘생명의 물’이란 뜻이다. 초기 증류주는 매우 귀한 것으로서 수도원이나 귀족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증류 기술이 민간에 널리 전해진 시기는 대략 15세기말에서 16세기 초로 추정된다.

18세기 초 스코틀랜드 국왕이 잉글랜드 왕을 겸직하면서 탄생된 대영제국은 재정 수입원으로 증류주에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였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이에 반발하여 산간 지역으로 피신하여 밀조를 하였다.

 

그들은 오크통에 위스키를 넣어 산간의 동굴에 저장하였고 몇 년 후 오크통에서 호박색의 환상적인 술을 발견하게 되었다. 위스키가 숙성된 것이었다.

이것이 숙성 방법으로 계승되었으며, 대영 제국의 번영으로 스카치위스키는 전 세계로 뻗어나가게 되었다.

 

 

원래 스카치위스키는 보리를 싹틔워 건조한 맥아로만 양조하여 양파 모양의 증류기에서 2회 증류하여 만든 몰트위스키를 말하였다.

몰트위스키는 몰트(Malt 엿기름)를 건조할 때 스코틀랜드에 지천인 이탄(Peat)을 연료로 사용하므로 훈연향이 강한 게 특징이었다.

 

그런데 1830년대 스카치위스키 수요가 폭발하면서 개량 양조법이 성행하였다.

연속식 증류기의 발명은 스카치위스키 산업에 일대 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곡물을 쪄서 맥아를 10%가량 첨가하여 당화, 발효시킨 후 연속식 증류기로 생산한 그레인위스키가 등장한 것이다.

몰트 위스키는 향이 짙고 품질은 우수하나 가격이 비싼 반면 그레인위스키의 향미는 밋밋하나 가격이 몰트위스키의 절반이다.

이런 장단점을 살려 많은 위스키 상인들은 몰트위스키와 그레인위스키를 적절하게 섞어 제품을 만들었다. 이런 혼합 방법을 블랜딩이라 하는데, 오늘날 판매되는 스카치위스키의 95%는 블랜디드 위스키이다.

 

위스키의 종류

초기의 숙성된 위스키는 비록 품질은 최상급이었으나 생산량이 적어서 가격이 너무나 비쌌다.

종전까지 생산된 전통적인 위스키는 맥아만을 원료로 썼으며, 증류 또한 단식 증류기(Pot Still)만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단식증류기, 복식증류기

단식 증류기는 양파모양으로 생긴 구리솥으로 세계 어느 나라에서나 거의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단식 증류기로 증류를 하기 위해서는 발효액을 증류기에 한꺼번에 넣고 끓여야 하며, 1차 증류된 액을 2차 증류해야만 비로소 위스키 원액을 얻을 수 있어서 생산성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증류시에 위스키의 품질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성분들의 함량을 조절할 수 있으므로 이 증류기로 생산한 위스키는 대체로 향이 풍부하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제조된 위스키를 ‘몰트 위스키(Malt Whisky)’라 한다.

 

산업혁명이 급진전되면서 잉글랜드 지방에서 위스키의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게 되자 위스키 제조업자들은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아일랜드에서 영국으로 이민 온 애니어스 카피(Aeneas Coffey)는 1831년 발효액을 연속해서 투입하여 증류액을 얻는 연속식 증류기를 고안하여 특허를 얻었다.

그는 이 증류기를 가지고 소량의 맥아를 사용하여 보리, 옥수수, 밀 등의 곡물을 당화, 발효시켜서 대량의 위스키를 생산하게 되었다.

이것을 ‘그레인 위스키(Grain Whisky)’라고 한다.

 

이 증류기는 오늘날 알코올증류뿐만 아니라 석유화학 공업에서 사용하는 산업용 증류기의 모체가 되기도 했다.

이런 방식으로 생산된 위스키는 가격은 싸지만 향이 약하여 품질 면에서 전통적인 몰트 위스키를 따를 수가 없었다.

 

 

1800년대에 들어와 위스키는 대도시의 상인들에 의하여 유통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위스키 제조업자들로부터 원액을 구입하여 자기 상표를 붙여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이들은 향이 강한 몰트 위스키와 값싼 그레인 위스키를 블렌딩하여 소비자의 요구에 적합한 위스키를 만들었다.

이것을 ‘블렌디드 위스키(Blended Whisky)’라 하며 오늘날 스카치 위스키의 약 97%를 점유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위스키 증류소

오늘날 스코틀랜드에는 약 100개의 몰트 위스키 증류 공장과 10개 정도의 대형 그레인 위스키 공장이 있다.

각 스카치 위스키 회사는 이들 공장으로부터 원액을 구입하여 블렌디드 위스키를 제조한다.

 

스카치 위스키가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은 해안을 따라 양질의 보리가 생산되었으며, 강에는 맑고 풍부한 연수가 넘쳐흘렀고, 산 구릉에는 연료인 이탄(peat)이 무진장 널려 있는 천혜의 자연 환경 덕택이라 할 수 있다.

스카치 위스키의 특색은 맥아 건조시 이탄으로부터 옮겨진 풍부한 향을 가지고 있으며, 장기적인 숙성으로 인하여 뒤끝이 깨끗하다는 점이다.

 

시바스 리갈(Chivas Regal)

오늘날 북해 유전으로 유명한 항구도시 애버딘은 19세기 인구 7만의 도시로서 스코틀랜드 동북부 지역의 양모 방직업과 유럽대륙과 무역을 하는 중심지였다.

 

스코틀랜드의 북동부에 흩어져 살고 있는 토속 종족인 시바스가의 제임스와 윌리엄 형제는 애버딘에서 종합 생필품점을 운영하였다.

시바스 형제들은 와인과 브랜디 리큐르 등을 프랑스로부터 수입하였고 스카치위스키를 블랜딩하여 판매하였다.

 

19세기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의 전성기였는데 당시 국왕은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1842년 빅토리아 여왕이 스코틀랜드를 방문한 것은 시바스 형제들에게는 크나큰 행운이었다.

빅토리아는 애버딘 근처의 산간 휴양지인 브레마를 방문하였는데 하일랜드의 풍경에 반하였다.

그 후로 여왕은 매년 그곳을 방문하고 발모랄 성을 지었다. 이른바 여름궁전인 셈이다.

 

이 성에서는 잦은 파티가 열렸는데 이때 물품을 공급할 대상이 필요했다.

1843년 시바스 형제는 왕실 납품 인증서를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받게 된다. 이것은 최고 품질의 물건을 취급한다는 증명서이기도 하였다.

이 인증서는 시바스 형제의 영광은 물론이려니와 하일랜드 전체의 영광으로 간주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알버트 공은 하일랜드를 ‘약간 원시적이면서도 낭만적이며 또한 야생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찬양했으며 많은 잉글랜드의 귀족들이 이곳에서 사냥과 등산을 즐겼다.

 

1860년 이전만 하더라도 프랑스의 꼬냑 브랜디가 잉글랜드의 상류사회의 사교술로 쓰였다.

그러나 그들의 잦은 스코틀랜드 여행으로 스카치위스키가 점점 선호되게 되었다.

특히 프랑스 포도원에 필록세라(포도 줄기를 갉아 먹는 벌레)가 창궐하여 브랜디와 와인의 공급이 중단되자 스카치위스키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스카치위스키가 최상 품질의 증류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시바스 형제의 역할이 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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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스 리걸 증류소 전경

시바스 형제는 하일랜드 지방의 여러 증류소로부터 품질이 좋은 원액을 구입하여 지하실에서 대량으로 숙성하였다.

제임스를 이은 알랙산더는 블랜딩의 천재로서 지하 저장고에서 스카치위스키를 블랜딩하였다.

 

시바스 위스키의 명성은 잉글랜드, 유럽 및 영국의 식민지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20세기 들어 시바스 형제는 사업 영역을 미국과 캐나다로 넓히게 되었다.

시바스 형제의 대표 제품인 시바스 리갈은 처음 발매될 때 25년 숙성된 제품이었다.

물론 애버딘의 지하 숙성고에서 블랜딩되고 제품으로 만들어졌다.

 

이 제품의 상표에는 왕실 납품 인증 내용이 인쇄되어 있었다.

시바스 리갈 제품은 12년생과 18년생 그리고 1801년산으로 시판되며, 세계 시장에서 프리미엄 위스키 중판매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커티 샥(Cutty Sark)과 그랜츠(Grants)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시절 영국의 배는 세계의 바다를 누비고 다녔다.

 

1869년 글라스고우에서 진수된 신예 범선 커티 샥호는 영국 배의 우수성을 세계에 드날리는 데 큰 몫을 했다.

영국의 차 상인들은 중국에서 런던으로 차를 실어 오는 배에 경쟁을 붙였다.
즉, 가장 빠르게 실어오는 배에 톤당 1파운드의 상금을 주었다. 이때 커티 샥호는 당시 범선으로서는 신기록인 시속 31.4킬로의 속도로 항해했다.

 

커티 샥은 마스트가 3개 달린 범선으로 1위를 해 빠른 배의 상징이었다.

1884년에는 호주에서 양모를 실어 나르는 경쟁에서 우승, 이름을 날렸다. 그리하여 이 배는 영국인들의 자존심이기도 하였다.

 

1918년 영국의 한 선원이 뉴올리안즈 항에서 초라하게 변한 커티 샥을 우연히 발견했다.

포르투갈에 팔려갔던 커티샥이 퇴물로 전락해 미시시피 강에 떠 있었던 것이다.

 

옛 추억을 못잊어 하는 영국의 팬들은 이를 다시 매입하여 런던 교외 그리니치에 보존했다.

런던에서 템즈강을 따라 그리니치에 가면 오늘도 19세기 후반 바다를 주름잡던 커티샥호를 구경할 수 있다.

 

 

1923년 커티 샥은 위스키로 발매되었다.

커티 샥은 대표적인 라이트 위스키이다. 맛과 향이 중후한 하일랜드의 몰트 대신에 가볍고 산뜻한 로우랜드 몰트를 주로 사용한 위스키이다.

커티 샥의 원래 어원은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여자의 짧은 속옷이란 뜻이다.
즉 그처럼 감미롭고 부드럽다는 뜻이다. 커티 샥의 색깔은 다른 위스키에 비해 매우 엷은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의 존슨 대통령이 방문하였을 때 그가 가장 좋아하는 술이 커티 샥이란 것이 알려지자 한때 인기를 독차지한 적이 있었다.

커티 샥은 스탠더드급이며 자매 브랜드로서 커티 샥 킹덤과 커티 12가 있다.

 

 

싱글 몰트위스키 글랜피딕으로 유명한 그랜츠 사는 유명 몰트위스키 증류소가 밀집되어 있는 스페이 강의 지류인 휘딕 강에 위치하고 있다.

설립자인 윌리엄 그랜츠는 1880년에 몰트 증류소를 설립하여 원액을 생산하였다. 그의 제품의 특징은 삼각형 병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싱글 몰트위스키인 글랜휘딕은 초록색 병에 담고 블랜디드 위스키인 그랜츠는 무색 병에 담았다.

스카치위스키의 대부분이 원액은 해안이나 하일랜드 지방에서 만들고 제품은 글래스고우나 애딘버러 근교에서 만든다.
그러나 그랜츠사에는 원액공장 속에 제품 공장이 함께 있다.

스코틀랜드 증류 공장은 대부분 거대 회사에 계열 공장으로 편입되었는데 그랜츠 사는 소규모의 독립 회사로 오늘날까지 성장하고 있다.

그랜츠의 제품으로는 글랜 휘딕을 위시하여 스탠더드급 그랜츠와 7년, 12년 및 21년산 그랜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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